할머니 집에서는 무조건 빨라야 해요
어른들도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은 참

어색하고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아이들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이 바라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야 한다면 말이에요. 아마 커다란 돌덩이가 올려진 것처럼 마음이 무거울 거예요. 발걸음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겠지요. 《할머니 집에 살아요》의 주인공 설아처럼요.
할머니 집에 도착한 첫날, 설아는 현관문을 들어서며 깜짝 놀랐습니다. 신발이 엄청 많았거든요. 집 안에는 고모네 송이랑 민수, 큰삼촌네 윤아랑 지수, 작은삼촌네 유진이가 모여 있었어요. 거실에는 아이들이 떠들고 노는 소리로 왁자했답니다. 수줍음 많은 설아는 사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건내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우리는 어디서 자요?”라고요.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이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결국 설아와 동생은 할머니와 방을 함께 쓰게 되었지요.
할머니 집에서의 하루는 집에서와는 무척 달랐습니다. 아이들이 많다 보니 아침마다 화장실 앞은 줄이 길었지요. 반찬으로 설아가 좋아하는 계란말이가 나왔지만 손이 느린 탓에 하나밖에 먹지 못했어요.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늦게 골라서 다 찌그러진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그제야 설아는 깨달았지요. ‘할머니 집에서는 빨라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날 밤, 잠자리에 든 설아는 두 주먹을 꼭 쥐며 다짐했습니다. 아예 잠을 자지 않기로 했어요. 하지만 늘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는 것이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어요. 울상을 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후두둑 후두룩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설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한발 앞서 노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지요.
할머니의 든든한 품에서 자라는 아이들,
우리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
어른들에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일을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기도 합니다. 옆집 아이와 엎치락뒤치락 다투고 나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같이 뛰어놀지요. 어른의 눈으로 보면 《할머니 집에 살아요》 속 아이들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쩌다 할머니와 살게 되었을까?’,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다니…….’ 애잔한 마음에 혀를 끌끌 차는 어른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 집에 사는 사촌들의 표정은 해맑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설아도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서 야물게 한 자리를 차지하지요. 복작복작하고 활기 넘치는 여느 가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설아의 할머니집 적응기이지만, 차분히 살펴보면 ‘할머니와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없이 아이들 곁을 지키는 할머니의 사랑과 할머니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글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림 곳곳에서 이 특별한 가족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작가는 밝고 깨끗한 색으로, 그리고 익살맞은 표현으로 그림을 채워 나갔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한 그림책들 사이에서 《할머니 집에 살아요》는 조금 독특한 울림을 전합니다. 묵직한 현실을 비틀거나 포장하지 않고 담담히 그리면서도 그 안에 단단하게 ‘가족’이라는 가치를 담았지요. 그래서 아이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도 가슴 한편이 저릿해집니다. 가족의 의미가 나날이 색을 잃어 가는 요즘, 할머니 집에 사는 일곱 악동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를 꼭 품에 안고,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에요.
◎한국어린이교육문화연구원 으뜸책 선정
◎2018년 서울시교육청도서관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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